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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조선의 대학자

마치 어제처럼 2019. 12. 31. 01:46

이황 조선의 대학자



서론


조선 중기의 대학입니다. 


그의 호는 ‘퇴계’이다. 


그는 평생 동안 학문 연구에 힘써 성리학(주자학)을 체계화하는데 힘썼고, 도산서당을 설립하여 제자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율곡이이와 함께 조선의 대학도였다. 붕당 중에서 동인이 시조로서 받들었다.


본론


이황은 1501년 경상북도 예안(현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총명했던 그는 독서를 즐기는 모범생으로 성장해 12세 때 논어를 익힐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이황은 34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중종, 민족, 명종, 선조 등 조선 제11대부터 14대 왕까지 지냈다. 


그는 왕으로부터 수많은 신하와 학자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자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고향으로 돌아가 학술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날 때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선조에게 성사를 바쳤다. 


이 책은 쑨양과 함께 유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황은 성리학 석학으로 '동양의 주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주자들의 이기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는 아이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과 결코 변하지 않을 법인 리를 '기'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이황,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의 제자들이 주리론의 뒤를 이어 영남학당을 결성하였다. 


영남권에서 주로 활동해 온 영남학파는 중부 지역에서 기호학파와 경쟁하면서 주리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기호학자들은 이황과 함께 '위대한 학자'라고 불리는 이이의 주기론의 계승자였다.





한편, 이황은 자리에서 물러난 후 1570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과 학술 연구에 몰두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그의 문집이 일본에 전해져 당시 일본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론


이황이 세운 도산서당은 후에 도산서원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사후 제자들은 도산서당 뒤에 도산서원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그의 뜻을 기렸다. 


2005년까지 발행된 1000원짜리 지폐 한쪽에 이황의 초상화, 다른 쪽에는 도산 서원의 전경이 세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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