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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CHY

기술시대에서 기억의 상실에 관하여

NO WAVE 2014.06.09 14:53

기술시대에서 기억의 상실에 관하여


공간에서 시간이 함께 중첩한다. 모든 움직임의 반복이 남아서 복잡한 역사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리적 시간은 바로 이 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바로 지금은 현재이며 이제 곧 도래할 시간은 미래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직진하는 시간을 지향성의 존재론적 사유로 바라보면 시간은 중첩되고 순환하는 동시성을 갖는다.


내가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나는 그 공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공간을 둘러본다. 거기에는 시각에 의해 세계가 대상화되어 들어온다. 이 흐름에서 기간은 직선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정지의 순간순간에 대상들은 나의 시각에 의해 드러난다. 최초의 공간이 창출된 시간부터 더 이전의 자연상태 그리고 더 이전의 빈 상태에 내가 동시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가 지하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았다. 열차는 끊임없이 시간에 따라 이동하는 속도운동을 한다. 이는 물리학의 기본법칙이다. 나는 빈자리에 머물러 어떤 행위를 한다.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어떤 생각에 잠겨있거나, 열차 내의 풍경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 행위는 내가 열차라는 공간 안에 특정 자리에 앉아있는 지금뿐만 아니라 이전에 같은 자리에 앉았던 과거의 행위자들에 이은 한순간일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연속된 하나의 역사 안의 연속체이다. 그것은 연속된 운동이자 기억의 연속된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주체는 장소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역사를 몸소 체험하는 한가운데 있다. 장소에 있던 여러 기억을 시간 안에서 역사의 경험을 몸소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장소의 특별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그 장소의 기억에 내가 순간적으로 박탈되어버리는 그것을 차단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어떨까? 역사의 흐름, 기억을 받아들이는 전달받는 존재에서 스스로 거부하면서 박탈하는 주체라면, 그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지하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는 같은 상황에서 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면 그 순간 나의 의식은 나의 손가락 끝에 집중하여 화면 속에서 응시된다. 이러한 순간적인 응시는 주변을 모두 흡수하듯이, 의식마저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의식은 체화된 경험에 따라 외부로 향하고 있지만, 스마트폰에 표상된 문자 기호들을 대상화하여 응시하기에 나의 주체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무의식 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기억의 전달을 박탈하는 비주체가 된다. 비주체는 문자, 기호의 이미지의 대상에 응시된 의식은 있지만, 경험이 박탈된 비존재이다.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태제2-


벤야민의 역사에 대한 테제는 독특한 역사 관점을 지닌다. 내가 그 장소에 있을 때 과거에 쌓여온 시간의 기억은 은밀한 약속의 전승물로 남아있다. 나는 스마트폰만 응시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외부와 분리되어 망각된다. 이 망각은 전승의 단절이자 과거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의 중첩을 다시 과거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대상화된 하나의 객체가 되어 과거의 은밀함과 미래의 가능성이 사라진 현재에 앉아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지각과 단절된 박탈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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