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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눈동자 Starry Eyes 본문

CINEMA

파멸의 눈동자 Starry Eyes

NO WAVE 2014.09.02 18:14




부천영화제에서 본 작품.


공포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그것도 예쁘지만 어떤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어 공포의 분위기로 휩쓸려 가는 여성이다. 컴플렉스는 불안을 동반하고, 이 불안이 커질수록 공포의 대상은 점점 그녀를 옭아맨다. 아마도 여성이 공포의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법칙은 여성이 지닌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함 때문이리라. 여성은 이렇고 남성은 이런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선입견의 결정론을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공포영화에서 남성은 겁없는? 허세를 부리다가 초반에 멍청하게도 일찍 죽는 게 고작이다. 아니면 합리적 논리를 앞세우다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키는 역할에 불과하다. 하여튼 여성의 섬세한 심리는 공포 대상과 적대적이고, 때로는 동화되면서 극도의 공포를 일으킨다. 단, 신체만 노출하며 단순한 캐릭터의 공포 영화는 그다지 재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한다.



사라 워커는 헐리우드 영화 스타를 꿈꾸며 낮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사라는 배우 지망생으로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으나, 오디션에 실패할수록 자기를 자책한다. 외부의 스트레스를 자신의 무능함으로 취급한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자존감이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히스테리적 패닉에 빠지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 뜯어낸다. 어느날 저명한 공포 영화사에 오디션을 보고, 제작자는 그녀의 머리 뜯는 행위를 보고 또 다른 오디션을 제안한다. 그리고 미래의 성공에 취한 사라는 추가적인 오디션 실패의 두려움과 영화사의 무리한 제안에 고민하며 자기 파괴의 절정에 이르던 중 일하던 레스토랑은 그만두고, 룸메이트와 조롱하는듯한 친구들의 시선을 못 견뎌 한다. 그러다 영화 제작사는 그녀에게 제작사 대표에게 몸을 바치면 영화 주연으로 낙점시켜준다는 조건을 내건다. 타인과 주변의 눈치에 의해 도덕성을 지키던 사라는 갑작스러운 제의를 거절하고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사라는 결벽증처럼 자신을 돌아본다. 그녀에게 욕망은 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금기와 같다. 이런 억압 기제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뽑는 히스테리 발작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신체는 항상 외부에 극도로 민감한 병리적 상태이다. 그녀의 반듯하고 올바른 듯한 행동은 스스로 결정하기보다는 자기 억압에 의한 죄의식이다. 겉으로 볼 때는 도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억압으로 인한 병적 히스테리의 자기 파괴인 것이다. 개인에게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이런 억압이 내포하고 있다. 개인이 스스로 판단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어떤 두려움과 제약이 이면에 깔려있다. 억압에 의한 히스테리의 산물로써 도덕이 주체의 행위는 사회로 확장하는 윤리와 다른 점이다. 국가, 사회, 가족, 회사 공통체의 규율에 훈육되고 노출된 현대인은 사라처럼 히스테리 주체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억압에 눌린 도덕과 제도 아래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존재들. 사라의 머리카락은 점점 줄어들어 가고, 신경 증상은 점점 심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불안한 자기 주체를 견디지 못하고, 영화사 대표에게 직접 다시 찾아간다. 


사라는 영화사 대표의 몸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지켜왔던 선은 넘어선다. 이제 사라의 내면에 쌓여있던 억압의 광기는 눈동자로 투영한다. 파멸의 눈동자, 여기서 눈동자는 주변의 시선에 견디지 못하던 욕망을 억제하던 눈동자에서 악마로 변하는 파멸돼가는 눈동자이다. 자신의 시선을 악마집단의 눈동자에 일치시킴으로써 악마의 눈동자인 그들의 ‘응시’에 사로잡힌다. 이제 그녀는 점점 그들의 악마적 욕망에 부응하고 주변 사람들은 살해하며 다시 태어난다. 완벽한 억압으로 히스테리가 사라진, 악마집단에 조정 당하는 영화를 위한 객체의 주인공이 된다. 사라가 한번에 윤리의 선을 넘어서자, 그 이후는 거침이 없다. 이렇게 한 번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도덕의 관념은 무용지물이다. 도덕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 체면에 의해 악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이를 넘어서 타인에게 강요한다. 니체가 도덕을 비판하면서 선악을 넘어서고자 한 지점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사라가 자신의 욕망을 자기 억압 없이 주체적으로 분출하고 행동했다면, 그녀의 히스테리적 행위는 윤리가 됐을 것이다. 일상에서 부분적으로 자기 파괴가 있다는, 실제는 단순한 도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스스로 파멸하여 악마의 눈에 주체를 빼앗겨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또 다르게 영화를 해석하면, 사라가 껍질을 벗고 자신의 아우라를 분출하는 연기자가 되는 과정이 일환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블랙스완>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 최후에 영혼까지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예술가들의 내면과 고통의 과정과 진정한 파멸의 배우로 탄생하는 파멸이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에서 악마 집단이 등장은 동일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사라의 새로운 탄생은 주체의 윤리적 행위보다는, 악마적 눈에 사로잡힌 기만된 도덕의 꼭두각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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