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WAVE

트라이브 The Tribe: 보편적 폭력의 시선 본문

CINEMA

트라이브 The Tribe: 보편적 폭력의 시선

NO WAVE 2014.10.13 00:33



트라이브 (2015)

The Tribe 
10
감독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
출연
그리고리 페센코, 야나 노비코바, 로사 바비, 알렉산데르 드시아데비치, 야로슬라프 빌레츠키
정보
범죄, 드라마 | 우크라이나, 네덜란드 | 130 분 | 2015-01-29



영화는 한 청소년이 버스 정류장에서 새로운 장소로 가기 위해 길을 묻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시작부터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롱 테이크 원샷으로 주인공 세르게이의 길을 따라간다. 그다음 컷에서는 학교로 보이는 장소에 주인공이 도착하고 고정된 카메라는 롱 테이크 원샷으로 학교 내부를 노출한다. 학교 교장으로 보이는 인물은 화려한 수상 소감을 하는 듯하고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과 관계자들은 그를 축하해준다. 이 와중에 세르게이는 입구 쪽 먼 길을 돌아 가운데 정원을 통과하여 학교의 내부에 들어온다. 그리고 원장실로 보이는 곳에서 수화로 상담을 나눈다. 여기서 이 학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 시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만약 영화의 사전 줄거리를 모르고 본다면 외부에서 내부의 세계로 들어온 세르게이의 이야기가 전형적인(?) 청각장애인 영화라고 착각을 부를 수도 있다. 영화에서 유일한 언어인 수화는 관객을 위해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다. 


"신비로운 것이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미로슬라브 슬라보슈비츠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무성영화처럼 찍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말은 탈취되고 연출된 몸짓과 음향만이 있다. 말은 영화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소통 수단으로 이해한다. 이는 말을 한다, 말을 보여준다는 더 높은 차원에서 소통가능성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말은 고유의 매개성으로써의 수단으로 이해되는 전시물이 될 수도 있다. 영화에서 말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수단의 장치물로 취급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몸짓은 목적없는 순수매개성으로서 소통이다. 몸짓은 항상 언어활동에서 파악되지 않는 즉석의 연기이다. 이 영화의 처절한 몸짓 위의 본질적 말의 침묵은 폭력을 뛰어넘는 순수 몸짓성이다.   



트라이브의 연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대하여 고찰해야 한다. 폭력은 크게 주관적 폭력(Subject Violence)과 객관적 폭력(Object Violence)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관적 폭력은 말 그대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폭력을 말한다. 영화에서 학교 내의 Tribe 무리에 합류한 세르게이의 폭력 행위는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다. 그리고 객관적 폭력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상징적 폭력은 언어의 명명에서 나타나는 근본적 폭력인 언어 자체에 들어 있는, 언어가 의미 체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르는 동일성의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은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구성하는 최소의 작은 단위부터 큰 사회까지의 구조 체계 내에서 나타나는 폭력이다. 우리는 가시화되는 주관적 폭력만을 보려하는 구조 체계의 함정에 빠진다.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이 동일 선상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거대화된 정치, 경제 체계는 언어 사용을 조작함으로써 어떤 체계 내에 파국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적 폭력을 교묘하게 주관적 폭력으로 옮겨버리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감독의 연출은 빛을 발한다. 상징적인 음성 언어를 제거하고 몸짓의 수화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느끼는 주관적 폭력을 의식하지 못하게 상징적 폭력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세르게이가 학교 시설에 들어와 점점 폭력의 중심으로 가는 과정을 한결같이 롱테이크로 보여줌으로써 모든 외부의 시선을 배제시켜 관객에게 직접적 폭력을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감독의 연출로 관객들은 영화의 첫 장면인 학교 장면부터 점점 드러나는 폭력의 고리가 뿌리 깊게 구조화됐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부산의 "형제 복지원"을 떠올렸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 정권 시절에 박인근 원장은 종교를 이용하여 장애인과 노숙자 보호 시설인 형제 복지원을 허가받아서 운용했다. 이 형제 복지원은 겉으로는 한국사회를 정화하는 복지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며, 이 덕분에 박인근은 국가로부터 각종 상과 명예를 수여 받았다. 그러나 이 이면에는 박인근의 권력을 통한 복지원의 사유화에 있었다. 엄청난 구조적 폭력 때문에 수많은 원생이 죽음에 이르렀고 현재까지 고통 받고 있다. 영화에서 세르게이가 편입한 농아 학교는 열린 구조이다. 학생들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매춘 행위를 통해 마음껏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이런 학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이들은 관리자와 선생들이다. 관리자와 선생은 Tribe의 소위 일진들과 연결되어 범죄를 통해 이권을 가져간다. 일진들은 학년별로 폭력과 훈육으로 원생들을 통제한다. 이런 구조적 폭력 체계로 존립하는 영화의 농아학교는 형제복지원과 동일하다. 학교는 외부로 항상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세르게이는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외부로 탈출하지 못하고 항상 내부 세계에 머물러야 하는 구조 속에 살수 밖에 없다. 이런 구조 속의 세르게이는 폭력이 일상생활이다. 학교에 오자마자 Tribe 조직에 편입되어 그들과 어울리며 각종 범죄와 매춘 행위를 사주하다가, 한 여자를 사랑한 그는 점점 조직에서 낙인찍히고, 결국에는 가장 하층의 원생처럼 기차칸을 돌며 불쌍한 장애인을 위해 봉제품을 파는 앵벌이 신세로 전락한다. 



일반적으로 약자에 대한 영화는 그들의 실제 삶이나 입장보다는 강자의 시선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선은 현실을 간과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감동을 조장하여 현실의 삶을 외면하는 문제가 따른다. 감독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너무 의식하여 내부의 현실을 연출하는 데 있어 부담을 갖는 것이다. 반면에 이 영화는 "장애인은 항상 착해야 한다."라는 통념을 넘어선다. 카메라는 고정된 롱 테이크 샷과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며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배재하고 내부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내밀하게 보여준다. 초반에 고정된 롱 테이크가 많았다면, 중반부로 갈수록 인물의 이동과 함께하는 샷들이 많아지는 것도 내부를 응시하면서 외부의 시선을 제거시켜주는 효과를 거둔다. 그럼으로써 장애인 농아학교의 특수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일반 사회 범주에서도 벌어지는 보편적 폭력으로 승화된다. 현실에 대한 보편성, 이 보편성은 관객이 선입견을 거두고 사회 전반에 폭력이 만연한 구조적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 함께 관람한 동반자로부터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세르게이의 마지막 충격적 행위 이전부터 붉은 화면과 눈 내리는 장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 모든 배우는 실제 우크라이나의 청각장애인들이라고 한다. 전문 배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 영화의 평은 전반적으로 좋은 것 같다. 감독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평가가 높지만, 내부적 폭력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리뷰를 쓰는 이유도 있다.

**** 형제 복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한겨레 토요특집 기사 3부작을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http://www.hani.co.kr/arti/SERIES/624/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0 Comments
댓글쓰기 폼